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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DEPENDENCE FIGURE

인물

’14. 2월의 독립운동가 금달연

작성일 2014.11.21 조회 2,293 작성자 학예연구부

본문

□ 공훈개요
• 성      명 : 금달연琴達淵
• 생몰연월일 : 1874. 2. 25 ~ 1914. 10. 21
• 주요  공적
   1906 의병부대 조직
   1907 이강년부대에 참여
   1908 중군호좌의병의 우군장으로 유격전 펼침
   1909 경북 순흥에서 체포됨
   1909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종신형 받음
   1914 옥중 순국
• 훈      격
   건국훈장 독립장(1980년)

 

□ 공훈설명
◇ 순흥에서 창의하다
  금달연琴達淵은 1874년 2월 25일 경북 순흥군順興郡(현 영주시) 단산면丹山面 단곡리丹谷里(下丹谷里)에서 아버지 금석주琴錫周와 어머니 안동권씨安東權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단산면 단곡리에 세거하던 봉성금씨鳳城琴氏 군위공파軍威公派이며, 벼슬은 참봉參奉이었다. 『봉성금씨군위공파보鳳城琴氏軍威公派譜(下)』를 통해 금달연의 가계를 살펴보면, 아버지 석주는 금진규琴晉奎의 세 아들 중 둘째로 태어나 숙부 금수규琴守奎에게 출계出系하였고, 현재 그의 후손은 없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 이후 1906년 3월 홍주에서 민종식閔宗植, 동년 5월 태인에서 최익현崔益鉉 등 전국 각처에서 봉기하였고, 경상북도 일원에서는 1906년 1월 영양에서 김도현金道鉉, 2월 진보에서 이하현李夏鉉, 3월 영천에서 정용기鄭鏞基, 영덕에서 신돌석申乭石 등이 봉기하였다. 1906년 5월경 경북 북부지역에도 영주‧풍기‧순흥에는 충청도에서 들어온 호서의병, 봉화에는 강원도에서 들어온 의병들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이 지역 출신으로 순흥에서 금달연琴達淵, 봉화에서 이춘양李春陽 등이 의병부대를 조직하고 활동하고 있었다.
  금달연은 1906년 순흥에서 김낙임金樂任과 더불어 의병부대을 조직하여 의병장이 되었다. 1907년 금달연은 이강년부대의 중군장 김상태와 연결하여 순흥의 일본군 헌병분견소憲兵分遣所를 습격하는 등 각처에서 큰 전과를 거두었다. 충청도 영춘永春 출신의 김상태金相泰(또는 尙台)는 1905년 제천에서 정운경鄭雲慶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는데, 1906년 김상태 등이 이끄는 호서의병이 경북 북부지역으로 넘어 와 소백산 일원에서 활동하였다. 이때 금달연은 김상태부대金相泰部隊와 합세하여 활동하였다.

 

◇ 이강년부대에 참여하다
  1907년 11월 3일(음 9. 28) 금달연은 단양丹陽에서 재차 의거한 이강년부대李康秊部隊에 합류하였다. 1907년 8월 제천에서 창의하여 도창의대장에 추대된 이강년은 충주성 공격에 실패하고 문경으로 들어가 군비를 조달하며 활동 거점을 마련하고 있었다. 11월 3일(음 9. 28) 금달연은 김상태의 소개장을 가지고 김낙임과 함께 휘하의 포군 수십 명을 거느리고 이강년부대에 합세하였다. 『운강선생창의일록雲岡先生倡義日錄』에서는 그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병진(11월 3일) 순흥順興의 금달연琴達淵이 포군 수십 명을 거느리고 중군장中軍將 김상태부대金相泰部隊에서 서신을 가지고 왔다. 금달연은 군례軍禮를 올리고 말하기를 ‘달연達淵은  김백우선생金白愚先生께 몸을 바친 지 한해가 넘었습니다. 지금 백우선생의 명으로 감히 뵈오니 죽이건 살리건 처분대로 하옵소서’하니, 공은 즉시 총독장總督將 이만원李萬源을 불러 별초종사別抄從事로 임명케 하였다. 정사(11월 4일) 순흥인順興人 김낙임金樂任이 와서 뵈었다. 김낙임은 왕년 순흥의진順興義陣의 소모장召募將 김영시金永詩의 이들이다. 신체가 매우 영약(?弱)하고, 또 독자獨子이므로 종군從軍하기 적합지 않은 고로 위유慰諭하여 보냈다.

금달연은 1907년 11월부터 1908년 7월까지 이강년부대의 별초종사別抄從事로써 영주‧순흥‧풍기를 중심으로 봉화?단양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이강년부대의 종사부에서 각 지역의 의병들과 연합하여 4~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일본군 헌병분견소와 수비대를 공격하는 등 대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07년 8월 이후 일본군의 의병 진압이 광범하게 전개되면서 대부대를 이끌고 활동하던 이강년이 1908년 7월 2일(음 6. 4) 청풍 작성전투鵲城戰鬪에서 체포되어 동년 10월 13일(음 9. 19) 교수형을 받아 순국하였다. 이에 이강년부대의 예하 부대장들은 소규모의 의병부대를 이끌고 독자적인 유격전을 감행하였다.

 

◇ 소백산 일대에서 유격전을 벌이다
  금달연은 1908년 7월 2일 이강년이 체포된 뒤 김상태와 함께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편성하고 유격전을 전개하였는데, 중군호좌의병대장中軍湖左義兵大將 김상태를 중심으로 하는 의병부대의 진용은 다음과 같다.

중군호좌의병대장中軍湖左義兵大將 김상태金尙台
도선봉장都先鋒將                        조복동趙福東

우선봉장右先鋒將                        김시중金試中
좌선봉장左先鋒將                        성문조成文助
후선봉장後先鋒將                        성치안成致安
우군장右軍長                              금달연琴達淵
좌군장左軍長                              원건상元建常

금달연은 중군호좌의병대장中軍湖左義兵大將 김상태의 우군장右軍長으로 영주‧단양 일대에서 군수품울 모집하고 일본군과 유격전을 펼쳤다.
  1909년 1月 18日경 금달연은 군수품을 수집하기 위해 부하 2명과 함께 총칼을 휴대하고  순흥군順興郡 화천면花川面 사제리沙堤里 거주 이종복李鍾?에게 총기로 위협하며 2십관문錢貳拾貫文을 제공하지 않으면 총살하겠다고 위협하여 8냥八兩을 갹출하였다. 그리고 1909년 4월부터 1909년 7월 일본군에게 체포될 때까지 총기를 휴대한 수명의 부하들을 거느리고 경상북도 순흥군 내의 여러 동리에서 군수품을 수집하였다. 즉 순흥군 화천면 화천리花川里 상림곡上林谷에 거주하는 장헌수張憲洙로부터 미米 3석, 동군 죽내면內竹面 여근리汝斤里에 거주하는 안도영安道永으로부터 미米 4두, 동군 단산면丹山面 오대리五帶里에 거주하는 권청교權靑橋로부터 벼 6석, 동면 병산리屛山里에 거주하는 황재호黃在鎬로부터 의류衣類 6건 및 미米 6두 등을 군수품으로 수집하였다.
그 외 금달연은 1909년 3월 14일 약 50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충북 단양군丹陽郡 동면東面 장현리獐峴里의 산중에서 단양순사주재소丹陽巡査駐在所에 근무하는 일본인 순사 2명, 한인 순사 2명과 약 3시간의 교전 끝에 총상銃傷 및 도상刀傷히고 한인 순사 2명을 살해하였으며, 이들이 소지하고 있는 물품을 탈취하였다. 또 동년 4월 20일에는 봉화 소천시장韶川市場 부근에서 부하 15명을 거느리고 약 20분간 일본군과 교전하다가 강원도로 넘어 가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금달연은 영주?풍기?승흥?봉화 일원에서 경북 북부와 강원도를 넘나들며 군수품울 모집하면서 일본군경과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이때 금달연은 그 휘하에 의병 18?20명을 거느리고 활동하였다.
  금달연은 1909년 9월 21일(음 8. 8) 순흥군 단산면 지곡동支谷洞에서 순흥헌병분견소順興憲兵分遣所의 순사대에 체포되었다. 그는 강도살인죄强盜殺人罪로 기소되어, 1909년 10월 29일(음 9. 16) 대구지방재판소大邱地方裁判所에서 종신징역終身懲役을 받아 복역하던 중, 1914년 10월 21일일 옥사하였다.

 

□ 참고문헌
 『봉성금씨군위공파보鳳城琴氏軍威公派譜』(下)
 『운강선생창의일록雲岡先生倡義日錄』(1948)
 「판결判決」(대구지방재판소大邱地方裁判所, 1909. 10. 29)
 『폭도暴徒에 관關한 편책編冊』(1909년 6월?12월)
 『독립운동사자료집』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한국독립운동사자료韓國獨立運動史資料』13‧16, 의병편義兵篇Ⅳ‧Ⅵ(국사편찬위원회國史編纂委員會, 1984?1986)
 『독립유공자공훈록獨立有功者功勳錄』제1권 (국가보훈처, 1986)
 보병제14연대步兵第14聯隊 『진중일지陣中日誌』(토지주택박물관, 2010)
 『영주독립운동사』(영주시, 2006)
 『봉화의 독립운동사』(봉화군, 2007)
 권대웅,「정미의병기 경북북부지역의 의병투쟁」(세명대 지역문화연구소『지역문화연구』6, 2007)

 

*담당부서 및 담당자:학예연구부 한준호/이메일:pantagom@hanmail.net/연락처:054-823-1555(FAX.054-823-15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