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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14. 11월의 독립운동가 김하락

작성일 2014.11.21 조회 3,079 작성자 학예연구부

본문

□ 공훈개요

 • 성 명 : 김하락金河洛

 • 생몰연월일 : 1846 ~ 1896. 7. 14

 • 주요 공적

   1896년 1월 경기도 이천에서 의진 결성

   1896년 4월 경기도와 충북 제천을 거쳐 안동에 도착

   1896년 5월 의성?청송의진과 연합하여 감은리전투 치름

   1896년 6월 경주연합의진 결성하고 경주성전투 치름

   1896년 7월 영덕 남천쑤전투에서 순국

 • 훈 격

   건국훈장 대통령장(1982년)

 

□ 공훈설명

1. 해운당 김하락의 출신과 의병활동

  김하락은 1846년 경북 의성군 의성읍 원당 3리 태생으로 자는 계삼季三, 호는 해운당海雲堂,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그는 신라 경순왕의 넷째 아들 의성군義城君 석錫의 32대손으로 부 김운휘金運輝와 모 덕수이씨德水李氏 사이에서 4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김하락이라는 이름은 훗날 개명한 것으로 본명은 김길주金吉周, 혹은 김일길金日吉이라고 하였다.

  김하락의 12대조 김거두金居斗는 공조전서(고려), 14대조 김한계金漢啓는 승무원사(조선 단종), 19대조 김근金近은 성균진사를 지냈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는 당쟁으로 인해 벼슬길이 막히자 증조부 김기수金琦洙‧조부 김동화金東和‧부 김운휘金運輝 등을 포함하여 김하락 자신도 관직에 나아가지 못했다.

  류천柳川이 편찬한『의성지義城誌』에 의하면, 김하락은 “근 40세 가까이 되어 처음 경서와 병서를 옥산 성동玉山 城洞의 암혈에서 읽기 시작하여 수년 만에 통달하고 자칭 길굴吉窟이라고 했다.”고 하였고, 자신은 「진중일기陣中日記」에서 황학산에서 공부했다고 하는데, 구체적으로 누구에게 수학했는지 학통이 분명하지 않다. 다만 영남유생으로 상경했던 재야유생의 신분이었던 것 같다. 김하락의 인상에 대해서 김도현은 「벽산선생창의전말碧山先生倡義顚末」에서 “키가 크고 시원스러우며, 그의 말은 쾌활하고 씩씩하다.”고 적고 있는데, 무인적 기질도 겸비하고 있던 인물인 것 같다.

  일찍이 서울에 거주하던 김하락은 1895년 11월 16일 조성학趙性學‧구연영具然英‧김태원金泰元‧신용희申龍熙 등과 함께 이천利川에서 창의하였다. 우선 양근‧지평‧광주‧안성‧음죽‧죽산 등 경기도 남부 일원에서 의병을 소모하던 중 안성에서 창의한 민승천閔承天과 합세하여 이천수창의소利川首倡義所를 결성하였다.

  1896년 1월 18일 백현전투魄峴戰鬪에서 처음 일본군을 맞아 싸운 김하락은 이현전투梨峴戰鬪와 남한산성전투南漢山城戰鬪 등을 치르고 경상도로 이동하였다. 그 후 김하락은 영남지방 각처를 전전하여 의성연합의진義城聯合義陣과 경주연합의진慶州聯合義陣, 그리고 영덕연합의진盈德聯合義陣을 결성하고 관군에 대응하여 불굴의 항전을 펼쳤다. 그는 6월 4일부터 7일까지 벌어진 영덕전투盈德戰鬪에 패한 뒤 강물에 투신하여 목숨을 끊었다.

  처음 김하락과 함께 창의한 인물들 중 조성학은 그의 이종제姨從弟이다. 조성학은 김하락의 권유로 의병진에 참여하였다. 그의 본집은 경북 풍기 백운동이었는데, 어릴 때 대구 팔공산에서 수학하였던 것 같다. 김하락과 비슷한 처지의 영남출신 재야유생이었다. 특히 조성학은 군사작전에 즈음하여 매번 점을 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주역을 공부하였고, 어느 정도 군사적 소양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김하락을 도와 의병진의 주요 작전을 결정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 외 구연영‧김태원‧신용희 등은 경기도 등지 출신의 인사들이었다.

  김하락은 일찍이 서울에 이거하여 충무공 이순신의 후손 이정배李庭培의 따님과 결혼하였고, 슬하에는 장녀 영규榮奎와 아들 병우秉宇를 두었다. 1896년 7월 14일(음 6.4) 그가 영덕전투에서 패하고 강물에 투신하여 순국할 당시 장녀 영규는 11세였고, 아들 병우는 5세였다. 그가 순국하자 영덕 강구의 한규열韓奎烈‧손치문孫致文 등이 그 시신을 수습하여 바닷가에 매장하였는데, 1914년 사위 정웅鄭雄이 충남 서천의 남산 축향丑向으로 반장하였다.

 

2. 이천수창의소의 조직과 투쟁

  김하락은 단발령이 공포된 다음날인 1895년 12월 31일(음 11.16) 조성학趙性學‧구연영具然英‧김태원金泰元‧신용희申龍熙 등과 함께 창의를 결심하고, 활동지역을 경기도 이천으로 정했다. 1896년 1월 1일(음 11.17) 김하락은 경기도 이천에 도착하여 당시 이천군의 화포군火砲軍 도령장都領將 방춘식方春植의 협조하에 의병진을 결성하였다.

  김하락은 방춘식과 상의하여 이천군의 포진도안砲陣都案에 수록된 포군 100여 명을 선발하여 수대數隊로 나누어 의병부대를 편성하고 의병의 모집에 착수하였다. 우선 구연영은 2대군二隊軍을 인솔하여 양근陽根‧지평砥平에서 군사 300여 명, 조성학은 2대군二隊軍을 인솔하여 광주廣州에서 남한산성의 별패진포군 300여 명, 신용희는 음죽陰竹‧죽산竹山에서 화포군 300여 명 등을 모집하였다. 그리고 김태원은 안성安城으로 들어가 이미 창의했던 민승천閔承天과 합세하기로 하고 돌아왔다. 뿐만 아니라 이천의 창의 소식을 들은 용인‧안성‧포천‧시흥‧수원‧안산 등지에서도 호응하여 이천으로 모여들었다.

1896년 1월 17일(음 12.3) 김하락은 이천수창의소利川首倡義所의 기치 아래 대규모의 의병진을 결성하였다.

 

「이천수창의소의 편제」

창의 대장 : 민승천閔承天

각군도지휘 : 김하락金河洛

도   총 : 조성학趙性學

좌군장 : 김귀성金龜性

우군장 : 신용희申龍熙

선봉장 : 김태원金泰元

중군장 : 구연영具然英

후군장 : 박주영朴周英

소   모 : 전귀석全貴錫

유격장 : 김경성金敬誠

돌격장 : 심종만沈鍾萬

도지휘종사 : 안옥희安玉熙

대장종사 : 최순룡崔順龍‧김명신金明信

도총종사 : 조순희趙舜熙

중군종사 : 최진엽崔鎭曄

 

이천의진은 1896년 1월 17일 백현전투魄峴戰鬪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2월 12일 이현전투利峴戰鬪에서는 크게 패하고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김하락은 진용을 수습하여 박주영朴周英을 대장으로 추대하였다. 1896년 2월 28일 김하락은 광주산성의진廣州山城義陣 심진원沈鎭元의 요청에 따라 남한산성에 입성하여 이석용李錫容의 양근의진楊根義陣과 합세하였고, 세 의병진이 연합하여 남한산성의진南漢山城義陣을 결성하였다.

  남한산성의진은 서울진공작전을 수립하여 투쟁하였으나, 3월 22일 관군에게 패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서울진공작전이 무산된 것은 말할 것 없었고, 이천의진의 인적?물적 기반도 무너지고 말았다. 4월 7일경 김하락은 이천의진의 대장에 추대되어 영남으로 이동하였다.

 

3. 의성연합의진의 결성과 투쟁

  김하락의 이천의진은 4월 9일 이천을 출발, 여주驪州(4.9)―흥원興原(4.10)―백운산白雲山(4.11)―제천堤川(4.12)―단양丹陽(4.13)―풍기豊基(4.14)―영천榮川(4.19)을 경유, 4월 20일 안동 유동역楡洞驛에 도착하였다. 이때 예천醴泉에 있던 서상렬徐相烈의 제의로 호좌의진湖左義陣과 합진하기로 하였고, 곧이어 안동의진도 합세하였다. 그런데 연합 후 달성達城을 공략하자는 논의 과정에서 서상렬은 병력 부족을 이유로 공격 중단을 주장하였다. 김하락은 이에 반대하여 공격을 강행할 것을 주장하였다. 결국 양 의병장은 의견의 합치를 보지 못하였고, 김하락은 서상렬과 결별하여 의성으로 진을 옮기고 다시 독자적인 행동에 나서게 되었다.

  김하락의 이천의진은 1896년 4월 28일 의성에 도착하여 금성면金城面 금성산金城山과 비봉산飛鳳山 사이의 깊은 골짜기에 있는 수정사水淨寺에 진지를 정하고 군비 확충을 위해 금성면 청로동淸魯洞의 김택용金宅溶을 영입하여 후군장에 임명하였다. 이때 군위에는 관군 300여 명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5월 9일(음 3.27) 의흥을 공략하여 무기와 화약을 대여섯 짐 가량 확보하였다.

  한편 군위에 주둔하고 있던 관군은 5월 10일(음 3.28) 의성의진이 진을 치고 있던 황산을 공격하였다. 이 황산전투에서 의성의진은 크게 패하였다. 5월 11일 김하락은 의성진의 패보를 듣고 사품沙品을 거쳐, 5월 12일(음 4.1) 대곡大谷에 진을 치고 있었다. 이때 관군에 쫓기며 청송으로 들어가던 의성진으로부터 구원 요청을 받았다. 이에 의성진을 따라 청송으로 들어간 김하락은 김상종을 만나 합세하고 관군에 대적할 준비를 하였다.

  이때 의성의진 김상종의 제의에 따라 이천의진과 청송의진이 상응함으로서 의성연합의진이 성립되었다. 이리하여 의성연합의진은 청송 감은리전투甘隱里戰鬪와 의성 비봉산전투飛鳳山戰鬪를 치렀다. 감은리전투는 1896년 5월 14일(음 4.2) 의성연합의진이 청송군 안덕면 감은리靑松郡 安德面 甘隱里에서 관군을 상대로 벌인 전투이다. 감은리전투에서 연합의진은 관군 10여 명을 사살하는 등 큰 승리를 거두었다.

  비봉산전투는 5월 20일(음 4.8) 의성?이천 양진이 관군과 벌인 전투이다. 감은리전투 이후 청송의진과 헤어진 의성?이천 양진은 그 본진을 다시 금성산과 비봉산의 깊은 골짜기에 있는 수정사水淨寺로 이동하였다. 수정사에서 전열을 정비한 연합의진은 비봉산전투를 치른 이후 5월 26일(음 4.14)까지 관군과 대적하였다. 이와 같이 의성연합의진은 청송 감은리전투와 의성 비봉산전투를 통해 명실공히 전투의병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비봉산전투 이후 의성의진의 김상종은 의병진을 해산하고 피신길에 올랐으며, 이천의진의 김하락은 경주로 이동하였다.

 

4. 경주연합의진의 결성과 투쟁

  5월 26일(음 4.14) 비봉산에서 출발한 김하락의 이천의진은 경주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5월 27일 이천에서부터 함께 활동해 온 구연영具然英이 이천 출신의 부하 30여 명을 이끌고 이천으로 돌아감으로 인해 김하락은 전력면에서 큰 손실을 입게 되었다. 결국 김하락은 50‧60명 정도의 병력을 이끌고 두음산斗音山‧황학산黃鶴山(5.29)―금학산金鶴山(5.30)―황산黃山(6.5)―실업동實業洞(6.6)―화목和睦(6.9)―도동道洞(6.10)―덕현德峴(6.11)―안덕安德(6.12)―유천柳川店(6.13)―입암立岩(6.13) 등지를 경유하여 6월 15일 경주 인비仁庇에 도착하였다. 이천의진은 경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6월 8일 실업동전투實業洞戰鬪에서 관군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

  김하락의진이 6월 15일(음 5.5) 경주 인비에 도착하자 경주지역의 유림 김병문金炳文‧이시민李時敏‧서두표徐斗杓‧박승교朴承敎 등이 찾아와 연합의진의 결성을 제의하였다. 이에 김하락도 흔쾌히 받아들여 새로운 편제의 경주연합의진이 조직되었다.

 

「경주연합의진의 편제」

창 의 대 장 : 김하락金河洛

경주군도소모장 : 이채구李采久

참모 : 이준구李俊九‧이종흡李鍾翕‧장상홍張相弘‧이우정李寓禎‧박승교朴承敎

좌봉장 : 서두표徐斗杓

우선봉 : 홍병태洪秉泰

좌   익 : 안옥희安玉熙

우   익 : 안재학安載學

중   군 : 이익화李益和

후   군 : 김두병金斗柄

좌   봉 : 이용관李容觀

우   봉 : 이상태李相台

좌포장 : 황성학黃性學

우포장 : 이시민李時敏

영   솔 : 김병문金炳文

 

  경주연합의진의 지도부 조직 구성을 살펴보면 크게 이천의진에서 참여한 인물, 의성연합의진에서 참여했던 인물, 경주에서 새로 참여한 인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천의진에서 참여한 인물은 창의대장을 맡은 김하락을 비롯하여 좌익 안옥희, 우익 안재학, 우봉 이상태 등이며, 조성학은 직책을 맡지 않았으나 전투과정에서 주요 인물로 활동하고 있었다. 의성연합의진에서 활동했던 인물은 의성의진의 후군 김두병, 청송의진의 우선봉 홍병태 두 사람이 참여하여 미약하나마 의성연합의진의 맥락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 외에는 경주에서 새로 참여한 인물이고, 나머지 참모 장상홍(흥해 출신)‧참모 이우정(흥해 출신)‧중군 이익화(울산 출신)‧선봉 이용관(울산 출신) 등이 경주 이외의 지역에서 참가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경주연합의진은 경주지역의 인물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면서도 이천의진‧의성의진‧청송의진 등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이 참여한 연합의진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물론 의병장은 대부분 독자적으로 의병부대를 거느리고 활동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의성의진이나 청송의진에서 활동했던 병사들이 경주연합의진에 참여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경주연합의진은 조직을 정비한 후 1896년 6월 17일(음 5.7) 경주성을 공략하여 점령하였다. 그러나 6월 20일(음 5.10) 대구부 소속의 관군과 안강 주둔 안동친위대安東親衛隊가 연합하여 경주성을 공략하자 6월 23일(음 5.13) 경주연합의진은 30여 명의 전사자를 내고 패퇴하였다.

 

5. 영덕연합의진의 투쟁과 순국

  경주성전투에서 패전한 김하락은 잔여 병력을 이끌고 달성達城(6.23)―기계杞溪(6.24)―흥해興海(6.25)를 경유하여 영덕을 향해 나아갔다. 이동 중 기계에 이르자 흩어졌던 병사들이 차츰 합세해 왔고, 청송의진도 다시 가담해 왔다. 흥해‧청하에서는 다시 의병을 모집하는 한편, 흥해 관아의 무기고를 공격하여 탄약을 조달하는 등 의병진의 진용은 차츰 정비되어 갔다.

  김하락은 일본군 수비대의 추격을 받으며 영덕으로 진군하였다. 6월 28일(음 5.18) 청송의진과 합세하여 6월 29일 영덕 장사를 거쳐, 7월 2일(음 5.22) 영덕읍에 도착, 영덕의진의 의병장 신운석申運錫이 합세하였다. 이후 김하락은 영덕에서 다시 의병 100여 명을 모집하여 더욱 진용을 강화하였다.

  7월 5일(음 5.25) 김하락은 다시 축산으로 이동하였다. 7월 7일 영해의진의 선봉과 좌익장이 찾아와 합세할 것을 요청 받고 영해부로 들어갔다. 7월 9일 안동의진의 전군 류시연柳時淵이 6개 부대를 거느리고 와서 합세하기를 요청하였다. 이에 김하락은 류시연과 함께 안동부로 진을 옮기기로 하였다.

  7월 11일(음 6.1) 김하락은 일본군이 청하에서 영덕으로 북상중이라는 첩보를 받았다. 우선 이채구李采九‧이준구李準九‧홍병태洪炳泰로 하여금 1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영덕을 향해 선발대로 출발하게 하였다. 그리고 김하락 자신은 7월 12일 조성학과 함께 영덕으로 들어갔다.

  7월 13일과 14일, 양 일간에 걸쳐 김하락의진과 일본병 사이에 접전이 벌어졌다. 첫날 전투에서 의병진이 큰 승리를 거두었으나, 다음날 7월 14일 수백 명의 일본군이 들이닥쳐 남천쑤南川藪에서 마지막 전투를 벌였다. 결국 의병진은 군사적인 열세로 인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투를 계속하던 김하락은 탄환 2발을 맞아 중상을 입었다.

  김하락은 “왜놈들에게 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고기 뱃속에 장사를 지내겠다.”고 하여 스스로 강물에 투신하여 목숨을 끊었고, 병졸 몇 사람도 김하락의 뒤를 따랐다. 김하락이 이천에서 의병 활동을 시작한 후 약 7개월 만인 7월 14일(음 6.4) 의병활동의 종지부를 찍는 장렬한 순간이었다.

  한편 김하락의진이 영덕에서 관군과 격전을 벌이고 있다는 소식이 인근에 전해졌다. 이에 김도현 및 안동‧영양‧선성 등지의 의병들이 영덕으로 이동하였으나 이미 김하락의진은 와해된 후였다. 김하락이 전사한 뒤 지도자를 잃은 잔여 의병은 산발적이나마 일정 기간 의병활동을 계속하였다.

 

□ 참고문헌

『의성김씨세보義城金氏世譜』, 1982.

김하락金河洛, 「진중일기陣中日記」, 독립운동사자료집』 1, 1971.

김도현金道鉉, 「벽산선생창의전말碧山先生倡義顚末」, 독립운동사자료집』 2, 1971.

정웅찬鄭雄撰, 「해운당김공행록海雲堂金公行錄」, 1914.4(의성문화원義城文化院, 『의성문화義城文化』, 제3호第3號, 1988).

한규열韓奎烈, 「의매씨전상답서義媒氏前上答書」, 1916(의성문화원義城文化院, 『의성문화義城文化』, 제3호第3號, 1988).

류천편柳川編, 『의성지義城誌』, 권30卷三十, 「인물人物」

                   (의성문화원義城文化院, 『항일독립운동의성군자료집抗日獨立運動義城郡資料集』, 1992).

『의성승감義城勝鑑』 권지이卷之二, 「인물人物」

                          (의성문화원義城文化院, 『항일독립운동의성군자료집抗日獨立運動義城郡資料集』, 1992).

류한철柳漢喆, 「김하락의진金河洛義陣의 의병활동義兵活動」,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집, 1989.

김희곤 외, 『의성義城의 독립운동사獨立運動史』, 의성군, 2002(권대웅, 제2장 의병항쟁).

안동대학교 안동문화연구소 편, 『경북독립운동사』Ⅰ(의병항쟁), 경상북도, 2012.

 

*담당부서 및 담당자:학예연구부 한준호/이메일:pantagom@hanmail.net/연락처:054-823-1555(FAX.054-823-15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