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일보] '근대교육의 요람' 협동학교 출범 초석 다졌다

작성자 기획관리부 작성일 2010.04.21 10:18 조회 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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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안동에 위치한 '내앞마을'은 영남의 사대길지(四大吉地) 중의 한곳으로 유명하다. 이 마을은 일제 강점기 때 독립운동가를 많이 배출한 곳이며, 오랜 전통을 이어온 명승지와 고택 등 다양한 문화유산도 함께하고 있다.

 특히 125년의 세월을 담고 있는 작은 고택 하나는 안동사람들의 정신적 문화유산이라는 별칭이 붙어지면서 문화재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필수답사 코스로 세상에 조금씩 알려지고 있다. 시도 기념물 제137호로 지정(2000년 4월10일)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일까?

 안동독립운동기념관 강윤정 학예연구실장과 함께 안동지역 애국계몽운동의 산실이자, 구국운동의 모체로 알려진 백하 김대락(白下 金大洛)선생의 옛 집을 배경으로 한 역사적 발자취를 재조명 해본다.

백화구려 측면 마루.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에 자리한 이 가옥의 당호(堂號)인 백하구려(白下舊廬)는 구한말과 일제 초에 국민계몽과 광복운동에 헌신한 백하 김대락(1845~1914)선생이 42세 때(1855) 세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애국적 논필로 풍운의 한말 정국을 매섭게 비판한 황성신문(皇城新聞)에 따르면 백하구려는 신축 당시 50여 칸의 가옥이었다(1909년5월)고 보도됐다.

 '백하'는 김대락의 호이며, '구려'는 옛 집(작은 초가집)이라는 뜻으로 건물의 당호인 백하구려는 김대락이 순국한 이후, 금상기(琴相基)에 의해 쓰여 졌다고 한다.

강윤정 안동독립운동기념관 학예연구실장

백하구려의 구조를 살펴보면 이 집은 정면 8칸으로 서쪽 4칸은 사랑채이고, 동쪽 4칸은 중문간을 비롯한 아래채로 구성돼 있다.

 사랑채는 막돌로 쌓은 2단 기단위에 서 있으며, 아랫단 기단은 앞쪽으로 3m가량 돌출됐는데, 협동학교 교사(校舍)로 쓰기 위해 사랑채를 확장할 때 넓혔다고 한다.

 앞에 쪽마루가 설치된 동쪽 2칸은 큰 사랑방이고, 이 사랑방 서쪽 뒤로 방이 한 칸 붙어 있어 안마당으로 통할 수 있도록 배치돼 있다.

 아래채는 사랑방과 붙어 중문간이 있고, 동쪽으로 광·아랫방·마루방이 한 칸씩 배열돼 있다.

 안채는 전면이 개방된 3칸 대청을 중심으로 동쪽에 남북으로 긴 2칸의 방이 놓이고, 그 앞으로 2칸 부엌이 뻗어 앞채의 아랫방에 접하고 있다.

 안채와 사랑채 모두 간소한 구조이지만, 안채 대청 앞면 기둥은 둥근 기둥을 세워 격을 높인 것으로 보인다.

 안동독립운동기념관 강윤정 학예연구실장은 "이 가옥의 중요성은 협동학교를 출범시킨 산실이라는 점과 건축주 김대락이 개화와 독립에 참여해 활약한 인물이라는 점"이라고 설명했다.

 비록 당시 협동학교의 교사(校舍)로 쓰던 건물은 독립운동 군자금 마련을 위해 처분되어 사라졌지만, 지금도 건물이 서있던 축대와 초석일부가 사랑채 앞에 남아 있다.

 백하구려가 김대락에 의해 건축되었다 하더라도 그 터전을 닦은 것은 아버지 우파(愚坡) 김진린(金鎭麟·1825~1895)이다. 그는 의성김씨 30세로 내앞마을 입향조 청계(靑溪) 김진(金璡)의 둘째아들 귀봉(龜峰) 김수일(金守一)의 후손이다.

 1825년 김헌수(金憲壽)의 아들로 태어나 백부 김억수(金億壽)에게 출계하였으며, 1886년 3월 17일 금부도사에 임명되었다.

 강윤정 학예연구실장은 "김진린이 도사(都事)를 지냈기 때문에 마을에서는 이 집을 '도사댁'으로 불렀다"며 "도사댁은 사람천석, 글천석, 살림천석으로 세칭(世稱) '삼천석댁'으로 불릴 정도로 경제력과 학문을 두루 갖춘 집안"이라고 소개했다.

 "당대의 가세를 입증할 만한 호구단자 넉 점이 집안에 남아 있지요. 이 가운데 김진린이 43세(김대락 23세)되던 해의 호구단자를 살펴보면, 솔거와 외거노비 30여 명을 거느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어요. 이들 노비들이 일직·선산·풍기·순흥에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 지역에도 상당수의 토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집의 규모가 빗공에서는 가장 큰 구자(口字) 반가 구조임을 보면 그 당시의 규모를 대강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백하 선생의 집은 당시 안동지역에서 세도를 부리는 여느 양반가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이곳의 특별함을 거론하며 주목하고 있는 것일까?

 학계 및 관련 전문가들은 "백하구려가 안동지역 근대교육의 요람이었던 협동학교의 교사(校舍)로 활용되었다는 점으로 볼 때 이 가옥을 새롭게 조명 할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의견을 모으고 있다.

 1907년에 가산서당에 설립된 협동학교는 안동지방 계몽운동의 산실이요, 안동 유림의 사상적 대변환의 갈림길이었다.

 사상적으로 보수성을 가장 강하게 고집하였던 안동지역에 혁신의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이를 경북 북부지역으로 확산시켜 나간 출발점이 협동학교였다는 것이다.

  

백하 김대락 선생은

대한제국 멸망 만주망명 결정 한인 교육·민족의식 일깨워

강윤정 안동독립운동기념관 학예연구실장

 1910년 대한제국은 멸망하고 말았다.

 이 시기가 김대락 선생의 일대 전환점이 되었던 것일까?

 "당시 안동지역 곳곳에서는 자진과 장례가 이어졌고, 이런 상황속에서 선생은 자신의 길을 결정해야 했을 것입니다. 척사유림들이 유가적 의리론과 출처관에 입각해 자진의 길을 선택하는 한편에서는 만주 독립군기지 건설론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고 합니다.

 김대락 선생은 만주망명을 결정했다.

 그의 망명길에는 마을의 청장년들과 조카들이 함께 했다고 한다.

 심지어 만삭의 임부가 된 손부와 출가한 손녀를 망명길에 대동했다고 한다.

 "1911년 만주의 삼원포에 도착한 선생은 한인들을 지도하고, 청년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워주는 등 만주 독립운동사에 불후의 업적을 남겼다고 합니다."

 하지만 1914년 12월 삼원포 남산에서 선생은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그의 뜻은 동생들과 후손들에게 이어졌다.

 강윤정 학예연구실장은 "선생의 여동생인 김락(金洛), 집안 조카 김만식(金萬植), 김정식(金政植), 김규식(金圭植) 종손자 김성로(金成魯) 등 집안 대대로 항일투쟁에 몸을 바쳤다"면서 "훗날 이들은 독립운동유공자로 포상, 백하구려는 2008년 5월 9일 현충시설로 지정됐다."고 말했다.

 백하구려 마당은 협동학교 교사들이 의병에 피살된 역사적 현장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래서 이 앞마당에 위치한 바위를 '비극의 바위'라고 부르는 것일까?

 조국을 구하려고 애쓴 영웅들의 혼(魂)이 서린 바위가 주위를 숙연하게 만들고 있을 뿐이다.

심용훈기자 simyh@kyongbu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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